한동안 TV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통해 '주원앓이' 열풍을 몰고 왔던 현빈 주연의 영화 <만추>가 드디어 극장에서 개봉될 에정이다. 이 영화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국내 팬에게 공개되었다. (물론, 그 전에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소개되었다.) 당시 현빈과 탕웨이, 그리고 김태용 감독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도 열렸는데 제작자는 이 영화가 곧 극장 개봉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런데 영화는 쉽게 개봉되지 못했다. 현빈의 인기나, 탕웨이가 갖고 있는 이슈도 이 영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운좋게 현빈드라마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극장개봉이 실현된 것이다. 영화는 그 소재로 보나 영상으로 보나 무겁고 암울하다. 그런데, 김태용 감독은 이러한 영화를 두 배우의 반짝거리는 매력으로 가득 채웠고, 안개 가득한 시애틀의 음울한 날씨마저 이 영화를 관광영화로 만들어놓았다.

여자 죄수, 사흘간 사랑에 빠지다

 영화의 시작은 미국 시애틀의 한적한 주택가에서 시작된다. 눈가에 퍼런 멍이 든 한 여자가 반쯤은 얼이 빠진 채 주택가 도로를 비틀거리며 걸어 내려온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다시 자기 집으로 뛰어간다. 거실에는 한 남자가 쓰러져있다. 이 여자, 미국이민자 중국여성 애나(탕웨이)는 남편을 살해한 것이다. 그리고 7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애나는 교도소에서 잠시 외박을 나온다. 딱, 72시간!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허락된 것이다. 애나는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멍하니 앉아있다. 버스가 막 출발할 즈음, 한 동양인이 버스에 허겁지겁 올라탄다. 버스비가 없는 모양이다. 애나에게 다가와서는 한국말을 해보더니, 곧 영어로 30달러를 빌려달란다. 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한다. 여자는 사흘 뒤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사람이고, 이 남자는 미국 땅에서 한국교포여자를 상대로 ‘포근한’ 몸장사를 하는 한국인 지골로이다. 서로가 그렇고 그런 과거와 현재를 가진 처지이기에 뾰족하게 끌릴 것도, 물릴 칠 것도 없는 그런 상황이다. 하지만 남자는 곧 이 여자에게 빠져든다. 도도한 얼굴빛의 이 여자도 곧 이 남자에게 끌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에게서 과거를 눈감고 현재를 외면하고 내일을 기약 없이 말할 수 있는 상대란 것을 곧바로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 약속된 시간을 지나고 애나는 교도소로 돌아간다. 남자는 이루지 못할 약속처럼 “네가 나올 때 이곳에서 기다릴게”라고 말한다. 안개만 가득한 시애틀, 인적 드문 고속버스 간이정류소. 커피숍에서 애나는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며 남자를 기다린다.

만추라는 영화, 이주익이라는 제작자

이 영화는 1966년에 이만희 감독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물론, 중국여배우도 시애틀도 등장하지 않는 한국영화이다. 가출옥한 한 여자죄수가 짧은 시간동안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쉽게도 이만희 감독의 필름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영화는 한국 최고의 영화로 손꼽혀왔다. 그 명성을 증명이라도 해주듯이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었다. 일본에서도 만들어졌고, 김혜자 주연으로도 만들어졌었다. (<마더>의 그 김혜자!) 그러나 대부분의 요즘 영화팬들은 이 영화에 대해 그 명성만큼 진면목을 알 수는 없었다. 몇 해 전 이주익이라는 영화제작자가 이 영화의 리메이크를 처음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이주익 보람영화사 대표는 이전부터 한국영화와 해외영화계의 합작을  주창해온 글로벌 영화인이다. 비록 진개가(천카이거) 감독의 <몽듀도원도>(최인호 원작)는 한국에서 제작발표회까지 가지며 기대를 갖게 했지만 프로젝트는 엎어진 상태이다.(대신 소품이라 할 <투게더>가 만들어졌다) 그의 야심은 계속 되었다. 견자단(김소연)을 끌어들여 <칠검>을 만들었고, 유덕화(안성기/최시원)을 엮어 <묵공>을 만든다. 이들 영화는 중국과 홍콩, 일본의 자본을 끌어들이며 효율적이며 안정적인 제작방식을 창조해내었다. 그리고 할리우드 자본까지 동원하여 장동건의 <워리어스 웨이>를 만든다. 그는 10여 년을 영화판에 있으면서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몇 해 전 모든 합작영화가 ‘무협/액션’에 과몰입한다고 우려를 표명했을 때 그는 일찌감치 또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지금 영화팬에게는 생소한 이만희 감독의 <만추> 리메이크이다. 무협액션에서 비켜간 <만추>는 문예물, 멜로물, 드라마이다. 심성에 자극하고, 스토리에 초점을 맞춘 정공법적 선택인 것이다. 그는 영화성공이란 대중의 심성을 끌어들이는 스토리가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추>가 보여주는 ‘낯선 공간에서의 낯선 이의 사랑이야기’가 사람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합작영화를 통해 익힌 캐스팅의 마력을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현빈의 국내적 인기는 최고수준이고, 탕웨이의 화제는 글로벌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주익 대표는 <만추>에 대해선 참 복 받은 선택이다. (그간의 고생을 한 번에 커버할 만큼 말이다.)

남자의 직업, 여자의 과거

시크릿 가든>에서 대책 없는 매력을 보여준 현빈은 이 영화에서 ‘지골로’ 역을 맡는다. 리처드 기어가 출연했던 <아메리칸 지골로>에서처럼 고객에게 최선의 서비스로 최상의 만족을 안겨주는 남자이다. 현빈의 연기는 그동안 보아온 한국적 ‘제비’와는 스타일이 달라 보인다. 외로운 누님의 말벗이 되어주고,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서도 웃음과 자제, ‘고객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주원앓이’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그래도 가정파괴범인 것은 어쩔 수 없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비극을 앞당기는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미국으로 건너와서, 고급 손목시계가 상징하듯 한국인 유한마담에게서 용돈을 풍성하게 받아쓸 수 있는 조건이지만 그에게는 현재의 자신을 벗어날 누군가/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까지, 그 아픔까지 사랑할 상대 말이다. 이럴 경우 서로 말이 통하지 않거나, 말이 그다지 필요 없는 외국인이 더 나을 것이다. 비록 영어로 대사를 나눌지언정 마음속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는 상대. 그런데, 그런 그에게 다가온 여자는 비록 영어로 대사를 나누지만 어느새 서로의 마음 속 깊은 아픔을 이해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탕웨이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도 기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었다. 자신감과 자의식이 충만한 여배우의 매력을 맘껏 발산했다. 이번에 만추 개봉을 앞두고 한국에 와서도 “현빈왔숑 현빈왔숑”하는 귀여운 멘트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현빈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영화이지만 <만추>는 기본적으로 여자주인공의 영화이다. 여자가 교도소에 가는 것도 교도소에 잠시 나온 것도 그 여인네의 아픈 과거와 짧은 사랑을 돋아내는 것이다.

시애틀의 미드나잇 카우보이

이 영화에서는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장면이 많다. 시애틀의 안개 장면은 물론 훈과 애나가 쏘다니는 시애틀의 데이트코스도 멋지다. 특히 시애틀 놀이동산에서 펼치는 두 사람의 ‘더빙 쇼’ 장면은 마치 우디 앨런의 작품을 보는 것 같은 매력을 안겨준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각자의 심정을 이입시키는 영화적 장치이다. 또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짧은 자유의 공기를 만끽하는 애나가 옷가게에서 옷을 입어보고, 귀걸이를 다시 하며(7년 만에 귀걸이를 하며 잠깐 눈을 찌푸리는 장면!), 그랬다가 공중화장실에서 그 옷을 벗어버리고 그냥 가버리는 장면이다. 억눌린 여자의 갈망은 곧바로 이어지는 훈과의 베드신에서 복잡한 심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김태용 감독의 자제된 연출력은 이 영화의 매력을 십분 끌어올린다. 영화 전체는 우울한 기조를 보여주지만 씬 하나하나가 한 땀 한 땀 장인의 공든 노력이 묻어난다. 김우형 촬영감독의 영상미도 아름답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시애틀의 분위기가 영원히 저런 식으로 고착될 만큼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는 <아메리칸 지골로>의 궤적을 따르지만 그 결론은 ‘미드나이트 카우보이’만큼 가슴을 휑하게 만든다. 마치 하나뿐인 내 ‘포크’를 빼앗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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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곰파일 정보소개